D+2
지로나에 가기로 한 날입니다.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이 아름다운 중세도시를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에펠다리를 보는 것도 잊지 않구요.
오전 10시 쯤 숙소에서 나와 렌페역까지 걸어가며 여유롭게 거리와 상점, 행인들을 구경했습니다.
마치 심즈 같은 육성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도시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렌페를 타기 전 배고픔을 달래려 렌페역 근처의 타파스집을 찾아 TAPA TAPA에 갔습니다.
분주한 바깥 풍경과 함께 한 크루아상과 라떼 한 잔은 여유로움과 만족감을 주었고, 셀카를 마음껏 찍고 싶었지만 '혼자'라 주변 시선을 의식하느라 그러지 못 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을 다 먹고 빌지를 요청했는데 직원이 OK 사인만 하고는 오질 않습니다. 인종차별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바빠 보입니다.
사정은 알겠으나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 빌지를 한 번 더 요청했습니다.
슬슬 불만이 생겼습니다. 동행이 있었다면 더 강하게 컴플레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그렇게 스쳐 지나갈 만큼 행여 기차를 놓칠까 하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기차 시간까지 1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드디어 빌지를 받고 계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원은 너무 바빠서 늦게 왔다며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마음이 풀립니다.
플랫폼을 꼼꼼히 확인해준 기차 역무원 덕분에 다행히 무사히 바르셀로나에서 지로나로 가는 렌페에 올바르게 탑승했습니다.
렌페에서는 주눅들지 않고 셀카를 마음껏 찍었습니다. 저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남자는 놀랍게도 저에게 한 순간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더 신이 나서 사진을 찍습니다.
지로나까지 가는 동안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사진 찍고 싶다! 찍을까?' 생각하는 사이 풍경은 저를 그대로 지나갑니다.
친구와 함께였다면 생각하지도 않고 사진을 찍었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지로나역에 내려 에펠다리를 찾아갔습니다.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도 거의 없어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에펠다리에서 삼각대를 펼쳐놓고 혼자 한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지나가던 여자 2명이 "사진 찍어줄까?"하고 묻습니다.
누가 봐도 배낭여행객이라 소매치기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핸드폰을 맡겼습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대화를 해보니 각각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합니다.
아마 바르셀로나였다면 핸드폰을 맡기지 않았을 것 같아요.
긴장을 풀게 만드는 매력있는 도시 지로나.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덥고 배가 고파 주스집에 가서 망고주스를 마시며 잠시 열을 식혔습니다.
그리곤 지로나 대성당에 가는 길에 또 삼각대를 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지나가는 남자 1명이 "사진 찍어줄까?" 물었고,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폴에서 왔다는 그는 쿨하게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고 떠났습니다.
지로나 대성당의 외관은 정말 웅장했고, 운 좋게 시간이 맞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로나 여행 중 유일하게 한국인 관광객을 마주친 지로나 대성당.
한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가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주섬주섬 삼각대를 꺼냈습니다. 이번에도 지나가던 여자 1명이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이 마을 주민처럼 보였던 아주머니는 제가 원했던 지로나 대성당을 배경으로,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시내에서 지로나 대성당으로 접어드는 입구쪽 아치형의 통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너무 덥고 허기지고 힘들었지만, 기차 타고 멀리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지로나 성곽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좋았습니다. 좋았는데, 어느 순간 좋아서 걷는게 아니라 개인 SNS에 업로드할 사진을 찍기 위해 의무적으로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원했던 여행과는 달랐습니다.
기대했던 풍경이 따로 있었지만 거기서 멈추고 지로나 시내로 내려갑니다.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구글맵을 켜고 평점이 높은 곳을 찾아갔습니다. 찬물로 손을 씻고 시원한 콜라를 얼음컵에 담아 마시니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이어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장소가 지로나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드라마에서 본 이국적인 장소가 눈 앞에 펼쳐지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삼각대를 세워두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카메라에 걸렸습니다.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저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진을 찍어줄 동행이 있었다면 삼각대 사진 보다 훨씬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장소였는데 아쉬움이 조금 남습니다.
이제 더 걷고, 여기서 쉬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쉬고 싶어졌습니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아직 몇 시간 남았지만, 일찍 돌아가기로 합니다.
돌아가기 전 지로나에서 유명하다는 젤라또 아이스크림은 먹고 가자는 생각에 구글맵을 켜고 발걸음을 향합니다.
아이스크림을 계산하곤 가로수길 벤치에 앉았습니다.
아이스크림과 토핑을 직접 골라 만들어진, 딸기 과육이 씹히는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고 달콤하고 시원하고 기분 좋았습니다.
때마침 운이 좋게도 지로나 대성당에서 종소리도 들려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로나는 이 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이 풀리고, 여행을 여행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되는 여행 후반에 방문했다면 더 좋았을 도시라고 느껴집니다.
좋은 인상으로 기억된 지로나의 기차역 앞에서 다시 한 번 사진찍기를 도전하고 싶었으나, 지로나에 도착했을 때 보다 더 많은 인파가 기차역 앞 레스토랑 테라스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동행 없는 젊은 여자 동양인을 호기심을 가득 담아 바라보는 눈빛들을 무시하고 차마 사진을 찍을 용기가 나지 않아 아쉽지만 기차역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갔어도 아마 저는 사진을 찍지 못 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큰 순간입니다.
기차 역무원에게 가지고 있는 티켓 보다 한 시간 빠른 시간의 기차에 탑승해도 되는지 확실히 확인을 받고,
생수 한 병을 사서 기차 플랫폼으로 올라갑니다.
방향을 헷갈려 한참 동안 불안해하고 헤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차에서 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노트북으로 뭔가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내릴 채비를 하자 미안하다면서 제가 내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끝까지 기분 좋았던 지로나.
기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길이 아침에 봤던 길이라 익숙하면서도
어스름이 내려앉아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 거리를 걸으며 게임 캐릭터, 혹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했는데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행복한 만큼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은 시간을 아쉽게 느끼며
내일 아침 일찍부터 있는 가우디 투어를 위해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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