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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여우의 즐거움

[도서/후기] 밝은 밤

by 새끼여우W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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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밝은 밤

#0.
마음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주옥같은 표현들이 참 많았다.

#1.
삶의 근원인 부모로부터,
부모의 자리에 채우려 했던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은 지연이
희령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재회한 할머니에게
부모 이전의 조상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부모, 남편,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마주하고
치유되는 과정이 녹아 있다.

#2.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그 지루하고 고약한 질문의 끝에
결국 체념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삼천이의 모습에 양가감정이 일었다. 슬픈 건지, 지혜로운 건지.
그런 어른들의 모습이,
그리고 내게도 있을 그 모습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혼란스럽다.

#3.
나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생각하지만
감히 지연과 동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슬퍼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참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세상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차갑고 모질고,
나 자신을 독하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그렇게 사는 방법 밖에는 모르는 모습에서.

#4.
이렇게 치열하게, 아등바등,
빈자리를 메워가며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
내게는 삶이고 즐거움이다.

이것 외에 삶을 즐기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옳다고 믿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방식일까?
이렇게 살면 후회가 남지는 않을까? 희령에서 지연이 쉬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5.
몰래 숨죽여 울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온갖 날카로운 생각들과 맞서 싸울 때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포근할 수가 없다. 이 책이 나한테는 그런 책이었다. 새비 아주머니, 새비 아저씨한테,
그리고 할머니한테
몇 번이나 위로를 받았다.

#6.
인생은 헤어짐의 연속이고,
더 이상 더할 것은 없고 덜어낼 것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삶 그 자체에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앞으로 살면서 더 느낄 무언가가 있을까?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 거야.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까.
두번째 삶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을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을까.
꿈이라고 의심하진 않았을까.

#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됐어.
끝은 결국 같아. 너랑 나도 헤어지게 될 거야,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그럴 거야."
"허무해?"
"앞으로 남은 인생이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벅차."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우리 대견한 영옥이.
아가 아처럼 울지도 않구,
마음 다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서럽구 외로웠어,
아즈마이가 다 안다.
오늘은 마음껏 울고 훌훌 털어버리라우.

#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러지를 못했다.
인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갔니.
미안해, 삼천아.

#
희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
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 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한 시간, 한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나, 희자 아바이가 참 귀해.
기래, 얼마 있으면 희자 아바이가 가겠지.
내 기걸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두 난 이쪽이 더 좋다.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 짧아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 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 없어.

#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서바이벌 게임처럼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를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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